오늘의 발견 (91)

  1. 가끔 나의 어린시절을 물어올 때가 있다. 어렸을 때 좋아하는 애에 대한 기억이라던가, 좋아하거나 즐겨하던 놀이라던가, 수치심에 대한 기억이나, 지금 돌이켜 생각했을 때 깜찍한 나의 행동같은 것들. 나는 그게 정말이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마 기억이 난다면 인화된 필름사진 속 정지된 장면을 통해 유추하는 것이거나, 가족 중 누가 너 그때 그랬어. 라고 얘기해주는 파편화된 장면들 정도가 전부다. 중고등학생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억이 어쩜 한 문장을 넘기질 못하는지. 내가 기억하는 건 1학년 땐 누구와 친했고 2학년 땐 누구와 친했다 정도이다. 내가 그 친구와 어떻게 친해졌고 어떻게 멀어졌는지 같은 구체적인 사건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채.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면 마치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사소한 디테일까지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 보따리는 잘 세공된 보석들이 가득 담긴 것처럼 풍요로워보였다. 그에 비해 먼지만 풀풀 날리는 나의 주머니는 가볍고 빈약했다. 나는 자주 주머니를 허리 뒷춤으로 숨기며 말했다. "내가 기억력이 안좋아서 그것에 관해선 할 이야기가 없어."

  2. 그래서 오늘의 대화가 나에겐 한 편의 동화같았다. 기억 주머니가 두둑한 친구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단어 하나를 꺼낸다. '빙수'. 그러면 비어있던 내 주머니에 문장으로 된 기억이 뿅 하고 채워진다. '야자시간에 버스를 타고 시청에 내려 빠빠라기에서 빙수를 포장해 학교로 돌아와 먹었어. 그런데 떠올려보니 거기에 네가 있었던 것 같아..! 들키지 않으려고 어느 야트막한 옥상에 올라가 먹었는데... 그래! 거긴 소각장 옥상이었어!' 나의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먼지 쌓인 낡고 오래된 서가에 빽빽하게 꽂혀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많은 기억에 쉽사리 꺼내볼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 책의 위치를 기억하고 함께 꺼내볼 누군가가 있다면 언제든 먼지를 털고 꺼내 읽어볼 수 있는 거였던 게 아닐까. 꺼냈는데 종이가 낡아 일부 뜯겨있더라도 친구의 책장에 같은 책이 한 권 더 꽂혀있다면 책장을 대조해가며 낡은 책을 수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내 주머니는 빈 주머니가 아니라 간단한 단서를 입력하면 압축이 풀리는, 오히려 기억의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아 효율적인 매직 주머니가 되었다. 나는 오늘 친구와 그 시절의 이름들을 규칙없이 꺼냈다. 이름의 갯수만큼 기억들이 이어졌다.

  3. 기억을 잘하는 친구에게 너의 기억 속 나는 어떤 아이였냐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하는 걸 그냥 좋아만 하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아이. 내가 생각하는 나와는 정반대의 얘기라 놀랐다. 뭘 결심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한 나여서 스스로 답답할 때가 많았는데. 고민의 시간은 나에게만 길고 지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돈으로 좋아하는 뮤지션의 앨범을 사면, 휴대용 씨디 플레이어에 넣어 교실 책상에서 나눠듣던 장면이 딸려왔다. 이런 것도 좋아하는 걸 실행한 역사라고 친다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크고 작게 실행하며 살아온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우린 헤어지기 직전에 각자 동화책을 만들기로 약속했다. 우린 인생을 미리 계획해두지 않기로 했으므로 나는 친구의 미래의 모습보다 어떤 이야기로 동화책을 채우게 될지 궁금해할 것이다. 친구의 기억주머니에서 어떤 보석이 끌어올려질지 너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