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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는 버스에서 오늘 뭘 발견했지? 생각하는데 창 밖에 전 회사 선배가 해맑게 웃으며 인도를 걷고 있다. 찰나의 순간이었는데도 웃는 얼굴을 보니까 반갑고 기분이 좋다. 제일 무서워하던 선배였는데. 지금 내가 기분이 좋은가 보다. 선배를 그리워한 적도, 그리워할 예정도 없는 걸 보면 선배는 나의 기분을 반사시켜 보여준 거울같은 역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새 안경을 껴서 그런가. 같은 도수여도 보이는 시야가 미묘하게 다르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있는 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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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안경을 끼고 세상에 나와 한 첫 생각을 기록하자면 "낭만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나서고 싶다"는 생각이다. 나의 낭만은 '굳이' 가 붙는 모든 것. 이 얘길 했더니 래리는 얼마 전 종이가 누렇게 바랜 헌책을 여섯권 산 것도 '나의 낭만이었다'고 호소했다. 내가 먼지가 까맣게 묻어나오는 책표지를 물티슈로 닦아 책장에 꽂으며 '읽지도 않을거 왜 이렇게 책만 사대냐'고 잔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듣고보니 그것도 낭만인 것 같았다. 잘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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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의 낭만은 오랫동안 미개봉 상태로 진열만 해두었던 CHS 엘피 두 장의 비닐을 벗긴 것이다. 턴테이블이 생기자마자 드디어 들어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는데, 지금 거래되는 값이 내가 샀던 값에 다섯배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차마 뜯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걸 팔게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른 엘피 수백장과도 바꾸자고 해도 거절했을 것이다. 그냥 너무 소중해서 흠집없이 깨끗한 상태로 모셔두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나도 모르게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혹시 정말 급하게 돈이 필요하게 될 지도 모르고..) 그런데 오늘 문득 이것은 음악을 재생하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을텐데 듣지 않고 전시만 하는 게 맞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생각에 미치자 비닐을 뜯을 결심을 하는 건 너무도 쉬웠다. 비닐을 뜯는 건 더 쉬웠다. 진공포장되어 볼 수 없던 안쪽면의 아트워크도 정말 멋졌고, 판의 컬러와 디자인도 끝내줬다. 판을 뒤집고 또 뒤집으며 계속해서 재생했다. 바깥엔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낭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