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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과수원에는 태어난 지 오 년도 안 된 귤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아빠는 은퇴와 함께 밭을 싹 갈고 무릎 높이 정도 되는 묘목들을 사다가 새로 심었다. 성장이 끝난 나무들은 아빠가 주말마다 가서 관리해도 충분했지만, 이제 자라나고 있는 나무들은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매일매일 가도 해주어야 할 일이 새로 생겨났다. 부모님이 보시기에 백수인 나는 손이 모자를 때마다 투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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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처음 한 일은 원래 있던 나무들이 뽑히고 남은 잔뿌리를 손으로 일일이 뽑아 제거하는 일이었다. 말이 잔뿌리지, 땅 위로 비죽 튀어나온 뿌리의 단면을 찾아 당기면 몇 미터씩 끝도 없이 깊은 뿌리가 뽑혀나왔다. 뿌리와 함께 올라오는 흙에서는 윤기있고 통통한 지렁이가 후두두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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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엔 묘목을 심은 후에 물을 주는 일이었다. 다 큰 나무들은 비만 제때 내려주면 물 줄 일이 없지만 어린 나무들에는 꾸준한 물 공급이 중요하다. 처음 나무에 물을 줄 때는 최소 두 명이 필요했다. 한 명이 둔덕이 충분히 젖을 때까지 흠뻑 물은 주면 다른 한 명은 뒤에서 호스를 잡아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백 그루의 나무들에 빠짐없이 닿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긴 호스가 필요한데 거기에 물이 가득 차있으면 정말 무겁다. 혼자 호스를 당기다가 아직 약한 묘목을 건드리면 쓰러지기 때문에 뒤에서 호스를 잡는 사람은 통나무 옮기듯 호스를 짊어지고 묘목들을 피해 길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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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시기에 가장 필요한 일은 나뭇가지마다 하얗게 맺힌 꽃봉오리를 일일이 따주는 일이다. 아직 열매 맺는 것보다 쑥쑥 성장하는 게 더 우선인 시기이기 때문에 나무의 에너지를 성장에만 쓰이도록 힘을 덜어주는 일이다. 작년에 나무의 키가 작을 땐 휘휘 나무사이를 돌아다니며 꽃을 따주었더니 며칠이면 끝났는데 올해엔 상황이 달랐다. 일 년 사이 키도 훌쩍 크고 가지가 사방으로 활짝 벌어져 한 그루에 달리는 꽃만 수백개가 된 것이다. 이 정도일 거라 예상못한 아빠는 손녀 백일잔치 때도 혼자 내려오는 일정을 앞당겨 꽃 따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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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이번 주말 부모님이 모임에서 강원도로 여행을 가게된 것이다. 부모님의 종종거림이 느껴져 주말 동안엔 내가 가서 과수원 문을 열기로 했다. 고맙게도 친구들이 도와줬다. 과수원 창고에 가보니 골라쓰라는 듯 큰꽃부터 잔꽃까지 형형색색 다양한 일모자들이 벤치에 놓여있었고 아빠가 추가로 사다놓은 새 꽃무니 방석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엄마가 친구들 주라고 미리 준 감물들인 손수건을 각자 목에 감고, 마음에 드는 일모자를 골라쓴 뒤, 장갑을 끼고 장화를 신고 일방석을 가랑이 사이로 끼워 뒤뚱뒤뚱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친구들은 나를 작업반장이라 불렀지만 나는 농장의 주인이 된 양 행동했다. 요령이 생기면 알려주고, 모자가 불편해보이면 바꿔다주고, 기온이 내려가면 점퍼를 갖다주고, 컨디션을 물어보고, 물을 챙겨주고, 식사시간을 체크하고, 작업 끝을 정했다. 그리고 미안하고 고마워했다. 내가 종종 과수원에 와서 도울 때 아빠도 항상 이렇게 미안하고 고마워했다. 혼자 외롭지 않게 일할 수 있어 즐거워했다. 과수원 문을 닫고 나오면서도 나는 아빠 마음이 되어 오늘 친구들에게 정말 맛있는 저녁을 사주어야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