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마지막 날. 연휴동안 해보고 싶던 무계획 버스 여행을 할 수 있는 날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전날까지는 비가 왔는데 아침에 눈을 뜬 순간, 평소엔 웃풍이 있어 찬바람이 드는 창문 틈으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렇게 하루를 의식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잠깐, 나 어제 고지혈증 약 먹었나?
어제의 기억 사이사이를 들춰보자. 일어나자마자 친구들과 온라인 회의를 했고, 끝나자마자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해 거실로 가져가 먹었다. 꼬꼬무를 봤는데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터질 때 그 곳에 있던 한국인 생존자의 이야기였다. 개봉 후 시기를 놓쳐 못본 영화 오펜하이머를 봐야겠다 마음 먹고는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세 시간 짜리 영화라 중간에 가족들과 저녁을 먹었고,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고 말하고는 다시 방에 들어와 영화를 마저 봤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곧바로 평론가가 영화의 구조와 플롯을 설명해주는 영상과, 과학자가 실제 인물들과 배경, 과학적 지식을 설명해주는 영상을 연달아 봤다. 그리고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열두시가 다 되어서야 저녁 식사를 했던 식기를 설거지했다. 이렇게 하루를 훑어보는 동안 약을 감싼 은박 종이를 손톱으로 톡 터트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지.
약 복용을 잊은 사실을 계속 상기하며 운동복을 입고 밖을 나섰다. 달리기를 하기 전에 가볍게 걸으며 6개월동안 한번도 매일 먹는 약을 거르지 않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비결을 물었다. 친구가 복용하는 약은 아침 식전에 복용하고 한시간동안 음식 섭취를 하면 안되는 강한 조건이 있기 때문에 식사를 위해선 꼭 챙겨 먹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고지혈증약 선배인 엄마는 익숙해질 때까지 알람을 맞추라고 했다.
점심을 먹고 약을 집어삼킨 후에 계획대로 무계획 여행을 떠닜다. 출근길 반대편 버스정류장에 가서 동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한 시도 창 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언제 내려야할지 고민했다. 치열한 두뇌회전을 하다 보니 어느덧 한시간이 흘러버렸고 종달초등학교에서 하차벨을 눌렀다. 이후 걷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지도도 목적지도 없이 마음 가는대로 방향을 정했다. 두 시간을 걸었더니 성산이었고 꼭 해보고 싶던 혼밥도 했다.
달리기로 시작해 온갖 선택을 하는 하루를 보내며 느낀 건, 하루를 의식하며 산다면 매일 해야할 일을 놓칠리 없다는 생각이다. 전날을 돌아봤을 땐 일어날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나에게 주입하는 일만 가득한 하루였다. 나는 의식하기 전에는 본능적으로 삶을 흘려보낸다. 그러는 편이 나에겐 훨씬 쉽다. 곤란하면 망각하고 그 상황에서 달아난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욕구도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온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얼마 전 읽은 책 속 문장을 빌려와 말하자면 '달아나는 나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와 앉힌(신유진, 열다섯 번의 밤)' 여행이었다.
한 시간 반쯤 걸었을 때부터 왼쪽 무릎 위 근육이 단단해지며 통증이 사라졌다. 다리와 그제야 한몸이 된 것처럼. 정성스럽게 살고 싶다. 나의 몸과 마음, 생각과 행동을 되도록 의식하며 살고 싶다. 내가 꾸준하게 해야할 일들과 놓치지 않아야 하는 일들을 잊고 싶지 않다.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알람이나 강한 조건 없이도 말이다.
저도 생겼는데 저는 먹어야 하는 걸 기억하고 있는데도 자꾸만 미루게 되더라고요. 무슨 심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랜 기간 미루는 것에 질리도록 익숙한 채 살아왔기 때문에 당황스럽진 않았지만 좀 큰일이네 싶긴 했어요. 그래서 약통에 '오늘 하루도 꽤 괜찮은 하루가 될 거야'라는 낙서를 추가했어요. 그래서 잘 먹게 됐냐고요? 아뇨 그래도 미루던데요? 다른 낙서를 하나 더 추가해볼까 싶어요. 그냥 이런 게 삶인가봐요. 바른 자세는 불편하니 쉽게 구부정해지는 몸에 몇 번이고 다시 힘을 주고 곧게 펴보는 것, 금방 또 등이 동그래지고 다리 한 쪽이 의자 위로 올라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번엔 조금 더 익숙해지겠지 하고 모른 척 시도해 보는 거 말이에요. 우린 분명 정성스럽게 살게 될 거예요. 왜냐면 이미 충분히 정성스러운 삶이니깐요. 내일은 우리 꼭 잊지 말고 미루지 말고 약 먹기로 해요!
절대 지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