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매점 바깥에 '국수'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걸 봐버렸다. 단어만으로 뜨끈한 국물과 호로록 빨려들어가는 면발이 상상되어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유리창 밖에서 매점 벽에 붙은 가격표를 확인했다. 4,500원! 반납할 책 다섯권을 그대로 짊어진 채 홀린듯 매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뭘 먹을 생각을 미처 못해서 지갑을 안 들고왔다. 계좌이체도 안 된단다. 주차 자리가 없어 차를 저 멀리 세웠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우선 책 다섯권을 반납하고 다시 다섯권을 빌렸다. 도서관을 나오니 이성을 되찾고 그냥 다음에 먹겠다고 말했다. 래리는 후회되진 않겠냐고 물었다. 래리는 이미 밥을 먹고 와 어차피 나만 먹을 거였다. 그런데 그 말에 나는 간절히 외쳤다. "후회되겠어!" 국수 국물을 들이키는데 정말 너무 행복했다. 평범한 맛의 4,500원짜리 잔치국수여도 이 정도의 확신을 갖고 먹으면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는 것 같다. 래리는 옆에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아이셔를 까먹었다. 도서관 앞 너른 잔디마당 위로 비가 한바탕 쏟아졌다. 래리는 드라마에 나오는 비 같다고 했다. 주인공은 반올림의 옥림이랑 욱이. 나는 선재업고튀어의 선재랑 솔이일 것 같은데. 국수는 국물까지 다 마셨다. 땀이 삐질삐질 났다. 그때 땀방울과 함께 나에게서 뭔가가 빠져나가기라도 한 걸까. 오늘 유난히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게 잔치국수를 먹은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더라도 가끔은 이렇게 내멋대로 하루를 편집하는 날도 필요한 것 같다. 어쨌든 오늘 잔치국수는 최고의 선택인 걸로.